나는 대학에서 기계항공을 전공했다. 공학부였고 3학년 때 전공을 항공으로 정했기 때문에 미래에 쿠웨이트 유전에서 근무를 할 것이라고는 전혀,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보다는 그냥 취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학부를 마치고 막연히 대한항공이나 삼성테크윈(현: 한화 에어로스페이스) 또는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루는 전공 수업을 듣는 공학관에 캠퍼스 리쿠르팅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대한항공,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여러 기업의 부스가 있었고 어차피 취업해야 하니 정보나 얻어보자라는 생각에 여러 기업 부스를 둘러봤다. 하이닉스 부스에서는 선물로 32MB USB를 받은 게 갑자기 기억난다. 하여튼, 그중에는 에쓰오일도 있었는데 지금 기억나기로는 제시 연봉이 가장 높았고 매년 산학장학생을 뽑고 있었는데 산학장학생이 되면 학비와 매달 소정의 용돈을 준다길래 덥석 지원을 했고 그렇게 나는 에쓰오일이라는 정유기업과 엮이게 됐다.
학부를 마치고 결정을 해야 했다. 지난 2년간 산학장학생 신분으로 받은 모든 지원금 + 이자를 위약금으로 뱉어낼지 아니면 그대로 입사를 할지. 사실 큰 고민이 되지는 않았다. 그대로 에쓰오일에 입사를 했고 나는 그렇게 울산에 위치한 정유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됐다.
정유 공장에서 근무를 한 지 약 2년이 지났을 때 하루는 인사과에서 나를 불렀다. 프랑스에 정유기술과 관련된 석사 과정이 있는데 갈 의향이 있는지. 운이 좋게도 선발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파리 근교 Rueil-Malmaison에 위치한 IFP School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다시 울산으로 복귀를 했다.
그렇게 공정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를 이어가고 있던 어느 날, 퇴근하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서울 갈래? CEO실”
당시 첫째가 어렸고 울산 생활에 적응될 만큼 적응이 됐기에 가기 싫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가기 싫습니다.”
사실 이 제안을 받기 전에 회사에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입사 선배 중 한 명이 CEO실로 발령이 났는데 끝까지 가지 않고 버틴 사건. 결국엔 회사에서 인사 발령을 철회하고 그 제안이 나에게 온 것이다. (인사발령 거부라… 에쓰오일이라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사실 본사에 있는 CEO실로 가면 진급도 빠르고 서울 생활도 가능하니 여러모로 장점이 있지만 새로 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하는 것이 귀찮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귀찮았고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공정부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었다.
다행히 회사는 나의 의견을 반영해 결국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안 지나 생산 과장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그렇게 생산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는데 2014년 경에 갑자기 사우디 아람코 이직 붐이 생겼다. 에쓰오일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기업에서 많은 수의 엔지니어들이 사우디 아람코로 이직하기 시작했다. 세금도 없고 연봉이 몇 배가 되기 때문에 다들 관심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내가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에쓰오일은 모기업이 사우디 아람코인데 회사 차원에서 모기업에 직원을 빼가지 말아 달라고 액션을 취했고 결국 에쓰오일 출신은 아예 지원 단계에서 차단이 됐다.
회사에서 액션을 취하기 전에 사우디 아람코로 이직에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부러웠다. 하지만 이직 기회가 차단되어 거의 포기할 무렵 리쿠르팅 업체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쿠웨이트는 어떠세요?”
그렇게 지원을 했고 지금 나는 쿠웨이트에서 근무를 한 지 정확히 6년 하고도 8개월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둘째는 쿠웨이트 이곳에서 태어나 잘 크고 있다. 연봉도 만족하고 업무 강도도 꽤 (많이!) 낮고 휴가도 연 45일이나 주니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럽지만 가끔 (사실: 자주) 일을 하면서 현타가 올 때도 있다.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나와 같이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동료들은 잘 알 것이다. 어쨌든 나의 경력은 이제 끝이고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이왕이면 경력 발전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면 라이프 밸런스를 포기해야 한다. 물론 나를 그럴 생각이 없다.
이제 예상 수명의 대략 반 정도가 되는 지금 시점에 인생 뭐 별 것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가족과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다.
하여튼 내가 지금 쿠웨이트 유전까지 오기 위해 여러 우연과 결정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대학교 캠퍼스 리쿠르팅 때 에쓰오일 부스를 그냥 지나쳤더라면 나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프랑스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기계 전공으로 분류되어 공정부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를 했을 것이고 이에 쿠웨이트로 이직은 어려웠을 것이다.
세 번째로 CEO실로 갔더라면 위와 마찬가지로 엔지니어로써의 경력은 단절되기에 쿠웨이트로 이직은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나는 가족과 함께 쿠웨이트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그때 당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대한항공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회사 관리자로써의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파일럿을 준비해서 파일럿의 삶을 살고 있을까? 현대자동차에 갔더라면? 에쓰오일 CEO실로 갔더라면? 아니면 그냥 정유 공장에서 관리자로써 경력을 이어갔더라면?
우연과 결정이 나를 지금 이곳으로 이끌었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알 길은 없다. 다중 우주론이(Multiverse) 사실이라면 아마 다른 우주에서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쿠웨이트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다. 적당한 때가 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다 그만두고 말레이시아나 태국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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